유대인 이야기(6)
이스라엘의 눈이 가리워짐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흔히 유대인을 목이 굳은 백성,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민족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계보에서 벗어난 민족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특히나 예수님이 오셨던1세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하신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 처럼 자식이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운다는 말들이 허구의 말들로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된 기소이유는 신성 모독이며, 이단의 민중 선동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내가 과연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과연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었을까? 내가 유대인이라면, 나의 분별력으로, 또는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선포하고 병든 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 하셨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대체로 갈릴리/가나와 같은 지방의 변두리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 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2000년 전 시대에, 하나님의 도성이며 성산이라고 불리는 종교와 순례의 도시에 사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과연 메시야 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처음에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 변두리 출신 예수님을 폄하 하였다(요1:45). 아마 내 자신도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다나엘 처럼, 또는 도시의 많은 유대인들 처럼, 예수님을 폄하하고, 못 박으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었을 지 모른 다는 추측이 더 맞을 지 모른다. 그 시대에도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 때문 일 뿐이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9)
사도 바울의 고백
바울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이다.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 흠이 없는 바리새인이며, 집안 좋은 로마 시민권자이며, 그 시대의 가장 엘리트인 가말리엘의 후생이었다. 젊은 바울은 촉망 받는 미래의 지도자가 되기에 부족함없는 조건들을 갗췄고,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서 복음의 사도도 변하게 되었다. 영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울은 그의 형제들인 유대인을 끔찍이 사랑 했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질지라도 그들을 구원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으로 가득찬 사람이다(롬9:3).
그러던 바울이 사도행전 맨 마지막에, 부득불 유대 땅을 떠나 이방으로 떠나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은 자신이 이방으로 행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으로 하셨다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우둔해 지고, 귀로 듣지 못하고 눈도 감아서,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을 애타게 붙들고 복음을 전해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이 임하기를 원해도 그들은 들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서방으로 전해 지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사도 요한의 고백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많은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적을 묘사하고 있다. 그 안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병든자를 고치고, 오병이어로 수천명이 먹고도 남고, 물위를 걸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적인 일들이 기록 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행하신 이유는 유대인들로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진실되이 믿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12:37-42)”.
사도 요한도, 사도 바울이 이방으로 복음이 전해 져야 하는 이유와 동일하게,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데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들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음과 눈이 어두워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것은 선지자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 되어야 하는 미래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눈이 가리워짐
예수님이 오시기전 700여년 전에 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가 가리게 할 뿐만 아니라 돌아와 깨닫고 고침을 받는 것을 염려하여 철두 철미하게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6:9-10)”.
유대인들이 완악한 것, 그들이 보고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의 이유는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에서도 동일한 이사야의 다윗의 예언을 인용 하였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11:8-11)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사도 바울은 이 말을 할 때 비밀이라며 그뜻을 알려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신비한 뜻은 이방인의 구원의 숫자가 채워지기 까지, 그리고 이방인의 구원 때문에 그들의 눈과 귀가 어두워 졌다는 비밀 안에 이루어 지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11:20)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7절)”고 자긍하지 말것과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부르심과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변개치 않는 뜻에 대해서 못 박듯 경고 하고 계시다.
왕따 유대인
우리 중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비밀에 대해서 잘 이해 하지 못하고 막연한 생각을 갖고 유대인들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다. 내 자신도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고 반 유대주의 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특히 유럽에서 전세기에 걸쳐 일어 났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생활의 패턴이 절기 중심이며, 자신들의 월력과 율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일차적인 마찰이 있게 되었다. 안식일이 금요일 오후에 해질 녁 부터 시작 될 때 세상의 사람들은 파티도 하고, 술도 마시고 거나한 음식으로 회포도 푸는 반면그들은 집에서 안식일을 경건하게 시작 해야 했다. 밖으로 나가기 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집에서 쉬며, 가족들과 지내야 하므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공통의 것들을 공유하는 삶에서 우선 제외되게 되었다. 세상이 하나가 되고 유대인 공동체가 대립이 되는 유럽의 왕따의 시작은 여기에서 부터 근거 한다. 그들은 나라가 없는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을 보호해 줄 정부가 없었다. 외교적인 힘도 능력도 없고, 돈을 움켜 쥐는 것이 가장 큰 안전 장치 였다. 법도, 친구도, 사회도 그들에게 안전지대를 제공해 주지 않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지적 자산과 돈은 그들을 세상의 핍박과 차별로 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자연히 돈에 집착하고 고리 대금업과 일반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것이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돈에 관한 것이라면, 인정에 치우기보다 그들의 실리를 늘 우선시 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그들은 더욱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질시를 받게 되었다.
눈과 귀가 열릴 것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가리워져 그들이 정작 바라 보아야 할 예수님은 바라볼 수없게 그들의 눈과 귀가 가리워졌다. 그리고 나라가 로마에 멸망하고 백성을 흩어지고, 그들은 사람들로 멸시받고 무시 당하는 떠돌이 민족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떠돌이 인생은 반드시 끝이 있는 방황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 지면, 그들이 보고 듣지 못했던 비늘이 벗어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가리웠던 모세의 수건이 걷혀 지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