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10)
이스라엘의 광야
오늘은 이스라엘 광야에 다녀오며 느꼈던 기억을 나누고자 한다. 일행이 탄 버스가 베드윈들이 운영하는 광야 텐트 호텔에 도착 하면서 광야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광야에는 덩치 큰 낙타들이 떼를 지어 한가로이 누워 있고, 베드윈들이 이곳 저곳 눈에 띈다. 일행 모두는 갑자기 모든 문명으로 부터 차단 되고, 완전히 다른 환경의 고대로 자연 스럽게 이입되고 있었다. 광야는 현대의 문명으로 건드려 지지 않은 채, 창조의 모습 그대로 숨쉬고 있는 듯 하다.
46-7도 를 오르내리는 광야의 열기 가운데, 텐트는 두터운 천으로 광야의 열기를 차단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에어컨없는 실내 더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큰 텐트 두개로 나뉘어 남녀가 따로 잠을 자야 한다고 한다. 한 텐트에 100여명은 족히 들어 갈 수 있는 넓직한 크기에 먼지가 풀풀 묻어나는 매트리스가 달랑 한장 씩 주어 졌을 뿐이다. 일반 호텔보다도 더 비싸다는 소리에 기대에 부풀어 들어왔지만, 표정들을 보니 광야의 밤에 대한 염려가 영력히 느껴 진다. 바닥이 흙이고, 먼지이고, 벌레가 이곳 저곳에 기어 다니고, 고양이 몇 마리는 천막 저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조심스레 주시 하고 있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나 이런 생활을 했으니, 불평이 있을 만 했겠다. 이 더운 날 물이 없었다면 그 원망의 마음도 조금 이해가 간다. 3년 군대 생활도 날을 꼽으며 하는데, 그의 10배가 넘는 시간을 광야에서 훈련받은 그들을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누그러든다.
베드윈의 환영식
베드윈들의 환영 준비가 되어 텐트로 들어 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베드윈 몇몇이 분주히 차를 준비 하고 있었다. 70여명이 텐트안에서 불을 피우고 함께 앉으니, 땀이 속으로 줄줄 흐른다.
가장 나이가 많은 리더로 보이는 이가 베드윈이 무슨 뜻인지 부터 설명하기 시작 했다. 베드윈은 유목민을 의미 한다. 목축을 하느라 소, 말, 양과 낙타등을 몰고 다니며, 물과 초목이 있는 곳에 텐트를 치고 사는 종족들이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마사다가 저 멀리 보이는 광야 한 가운데이다. 주인은 직접 광야에서 줏어온 나무들로 불을 붙여 물을 끓여 작은 잔에 차를 대접했다. 그리고 커피알을 시커멓게 탄 후라이팬에 구워서 절구에 갈아, 커피를 맛보게 했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중요한 예절이며,관습으로 여긴다고 한다. 적어도 삼일은 무료로 재워주고 먹여 주고 아내를 원하면 아내 까지도 내어 준다고 한다. 자기는 네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으므로 돈은 들지만 괜찮다고 했다. 아내에 관한 것까지는 너무 심했다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 천사를 대접하듯 나그네의 외로움과 어려운을 돕는 마음은 소중하다고 느껴졌다. 광야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랍의 커피 향기가 어두운 텐트안에 퍼지며, 문명과 떨어진 그들의 삶에 대해 더 듣게 되었다. 수천년의 역사 가운데, 자신들의 삶은 문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대를 이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랑 한다. 자신은 아랍인으로 자신도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자녀들도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21세기에도 현대 문명과 교육으로 부터 격리되어 고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불과 한시간 남짓 차를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이 삶의 원천이며, 생존과 행복의 조건으로 존재하는 인생을 산다. 광야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낙타를 타고..
베드윈들이 저녁을 준비 하는 동안, 우리는 낙타를 타고 20-30분 정도 광야를 한바퀴 돌았다. 낙타들의 등은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베드윈이 앞서 낙타를 인도 하면 한 마리씩 그뒤를 따랐다. 낙타는 말과는 달리 발굽을 달지 않았다. 대신, 둥그런 발바닥에 두툼한 살이 고무 처럼 붙어 있어크고 작은 돌들이 즐비 해도 그것을 지려 밟고 지나 갈 수 있었다. 광야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았다. 먼지와 모래만이 가득할 것같은 나의 생각과 달리 왜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돌들이 등장 하는 지 새삼 알게 되었다. 낙타 위에서 내 얼굴 전체를 감싸는 더 깊은 광야의 바람이 스치니, 저 만치 멀어진 출발점에서 느끼지 못한 나그네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알지 못하는 길을 사막 한 가운데서 걸어야 한다면, 나침반없는 막막한 길을 어두운 밤에 홀로 걸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까? 엘리야도 이런 길들을 쫓겨 지나며 절망 했겠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원망을 한몸에 안으며, 맨 앞에 서서 이 바람을 맞을 때 모세도 고심 했겠지.. 야곱이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갈 때 외로움과 두려움 가득한 가슴으로 이 바람을 맞았겠지… 광야는 시작도 하기 전에 예상치 못한 감동을 보너스로 준비 하고 있었다. 내리려니 잔뜩 벌려 앉았던 다리가 뻐근 하다. 목동이 뭐라고 하니, 덩치 큰 낙타가 무릎을 굽히고 공손히 우리를 내려 놓는다. 일주일 동안 아무런 물을 먹지 않고도 많은 짐을 지고 사람을 태우고 광야를 지나게 하는 고마운 동물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 고마운 마음이 드니, 냄새도 정겹고, 생긴 것도 착하고 귀엽다. 광야는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한다.
광야의 해가 황혼 빛이 되어 찬란한 모습으로 땅 저 끝 걸릴 즈음, 저녁이 시작 되었다. 시골 타작 마당에 큰 멍석을 깔아 놓고, 저녁을 먹듯이 밥상에 삼삼오오 둘러 앉게 되었다. 어두워 잘 색이 구분되지 않았지만, 양고기와 닭고기, 여러 종류의 소스와 야채와 닭고기가 섞인 파엘라 같은 음식이 풍성히 식탁에 올랐다. 빵과 버터, 코디얼같은 음료.. , 여러 종류의 젤리와 크림이 디져트로 나왔다. 광야의 음식치고는 너무나도 훌륭한 저녁이었다.
광야의 밤
이제 밤은 더욱 깊어 지고 까맣게 칠해진 것 같은 하늘에 별들이 보이기 시작 한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던 것을 보신 예수님이 그를 만날 때, 참 이스라엘 사람 중에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며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아래 묵상하는 그를 주목하고 계셨다. 더 이상 무화과 나무아래에서는 글을 볼 수 없는 어두움이 깔렸다. 대신 하늘에 총총히 떠오르는 별빛이 광야 텐트에서 올려드리는 찬양의 열기가 빛을 더하는 것 같다. 광야의 밤이 깊어 간다. 땅끝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이 어둠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 어두움이 깔린 광야는 우리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초청하고 있었다.
나는 새벽에 눈을 떠 4시에 광야로 나가 보았다. 이제는 오직 별빛 만 보이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것도 분간 할 수 없는 적막한 광야에 발에 밟히는 돌뿌리들을 젖히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깊이 나가면 갈 수록, 고요의 깊이가 더해 간다. 가만히 조금 큰돌을 찿아 앉고 보니 괜히, 들짐승이라도 달겨들면 어떨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언젠가 시드니에서 새벽에 묵상을 한다고 아침일찍 공원에 갔는데, 큰 개가 어슬렁 거리며,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일대일로 마추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숨을 죽이며 속으로 기도하고, 개는 나를 한바퀴 돌아보고는 아무일 없는 듯 물러 갔지만, 식은 땀을 흘리며 오금이 져렸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적막한 광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부여 잡으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다. 그리고 마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한다. 나는 결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 할 수도 없는 쓸모 없는 존재 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광활한 사막과 열풍과 끝없이 어둠 속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메마른 광야, 척박한 광야, 거친 광야 그 광야는 낮에도 밤에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듯 하다. You are nothing.
광야의 유대인들에게 하셨던 신명기 말씀이 떠오른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새벽이 깊어 아침이 오고 태양이 떠 오르면, 아무리 찬란 하게 빛나던 별들도 모두 자취를 감취고 만다. 모든 빛들은 더 밝은 빛 앞에 무색하다. 어두움은 빛이 오면 물러 간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광명한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광야는 우리를 낯추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곳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인 것을 알게 하는 장소이다. 자유를 만끽할 만한 시기의 유대인들에게 먼저 그것을 알게 하신 곳이다. 그리고 모든 신앙의 인물들이 어김없이 지나며,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곳이다. 태양은 떠오르고 새로운 아침이 우리에게 다가 온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찬란한 아침은 결코 존재 하지 않는다. 광야는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비밀을 감추고 이 아침에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