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9)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메세지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성경을 짜면 하나님의 사랑의 진액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극히 함축된 표현이지만, 그 본질에 대해 와 닫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 이시라” 고 말하는 사도 요한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향해 사랑의 메세지를 던져 주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에 대해 약속하시고, 또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이미 4000년 전에  한 사람을 택해 그 사랑의 여정을 시작 하셨는데, 그가 바로 구약의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동일한 약속을 이삭과 야곱에게도 개별적으로 확인 시키셨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야곱은 장자권을 빼앗기게 된  형 에서의 추적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20여년이나 나그네 삶을 살았지만, 그가 두 아내와 열두 아들을 얻고, 큰 부자가   되었을 때 그의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축복을 위해 죽기 살기로 씨름을 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그후,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더불어 가나안에서 살다가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 커다란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요셉이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간 비극적인 사건이 그 배후에 있었다. 야곱은 요셉을 끔찍이 사랑했다. 형들과 달리 채색 옷을 입히고 각별히 키웠다. 그것은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요셉은 형들의 모의로 가족을 떠나 먼 이국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일은 야곱의 마음에 평생의 상처가 되는 가정의 비극이 되었다. 그러다, 야곱은 평생 죽은 것으로 알았던 아들 요셉을, 피난 가다시피 떠난 애굽 땅에서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고, 야곱은 평생의 한을 풀게 되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이 버렸던 요셉으로 부터 용서를 받고 애굽 고센 땅에서 그들의 새로운 삶을 시작 하게 된다. 


고센 땅의 유대인들

요셉은 야곱과 그의 형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게 하였다. 그리고 애굽에 도착한 아버지 야곱을 고센 땅에 가서 만나, 아버지를 끌어 안고 울며  20여년의 버려진 삶의 회한을 풀게 되었다. 그 때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이제 곧 바로를 만나게 될 텐데,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선조로 부터 목축을 한다고 대답하면 의심 없이 고센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 특별한 힌트를 알려주고 있다. 왜 요셉은 그들의 직업에 대한 힌트를 주었을까? 그리고 왜 그는 넓고 넓은 애굽 땅 중에서, 고센 땅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유대 주석은 이렇게 대답 하고 있다. 

 

고센 땅은 나일강의 지류를 따라 삼각지대에 위치한 비옥한 땅이라고 한다. 애굽 사람들은 크게 세가지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는데,  바로 나일강, 태양, 그리고 바로 왕 자신이었다고 한다. 나일강 부근의 비옥한 땅에서  이스라엘 이라 불리는 야곱의 가족들은 그들 만의 문화를 지키며, 그들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세상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 갈 수 있게 되었다. 요셉이 총리인 만큼 그들은 왕궁 근처에서 화려한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바로에게 그저 목축하고 멀리 떨어져, 애굽의 정치와 사회, 경제적인 것에 특별한 위해 요소가 되지 않는 곳을 정해 바로의 신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고센을 택했다. 그리고, 야곱과 아들들은 바로의 배려로 고센 지역 중 라암셋이라고 불리는 가장 좋은 땅을 소유하게 되고 먹고 사는 모든 것을 공급 받게 되었다. 그들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민족의 태동을 하나님은 고센 땅에서 부터 시작 하게 하셨다.  


야곱의 죽음

야곱의 죽음이 임박 했을 때, 요셉은 애굽에서 낳은 두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죽음을 앞 둔 야곱을 찿았다.  야곱은 요셉을 대신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그의 아들로 받아들일 것을 유언하고 두 아들을 축복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장자인 므낫세에게 오른 손을 얹지 않고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얹어 축복하는 특별한 장면을 보여 준다. 마치 차남인 야곱이 장자인 에서의 축복권을 빼앗은 것 처럼 야곱은 스스로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의도적으로 축복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은 이렇게 기도 하고 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48:15-16). 야곱은 요셉의 두아들과 그의 다른 동생들도 야곱에게 축복하신 동일한 축복의 약속이 후손 대대로 애곱의 아들들에게 이루어 가도록 특별한 축복의 의례를 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히 붙들고 있는 지,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 것을 신뢰 하고 있는 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장자인 므낫세가 축복의 우선권을 가지리라 생각했던 요셉의 반문에, 야곱은 당연한 듯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창48:19-20)”. 하나님의 뜻이 먼저 되고 그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섭리안에 그는 마지막 축복의 손을 그의 후손들의 머리에 얹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동일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시다. 이는 야곱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먼저 구별하여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험한 인생을 나그네 처럼 살아온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자식들에게, 특별히 사랑하는 요셉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은 무엇 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 하는 그의 믿음에 근거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 그것이 성취 되게 하려는 그의 순종의 의지를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야곱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 가족의 매장지로 삼은 막벨라 밭굴에 뭍히게 되었다. 요셉은 그의 형들과 더불어 고센 땅으로 부터 먼길을 지나 꿈에도 그리던 고향인 가나안 땅에 가족과 함께 드디어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요셉이 죽으며 야곱처럼  자신의 유골을 가져다 가나안에 장사 해 줄 것을 유언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특별한 여정이 되었음을 짐작 하게 한다. 그의 나그네 인생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 삶의 뿌리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갈망은 애굽으로 돌아오는 꿈의 사람 요셉에게 먼 앞날에 이루실 하나님의 꿈을 기대하는 또 하나의 꿈이 잉태 되는 여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먼 훗날 모세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출애굽을 꿈꾸고 있었다. 하나님의 꿈이 그에게 임하고 있었다.   

 

모세와 출애굽

요셉도 죽고, 많은 세월이 지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다스리게 될 지음 이스라엘자손은 번성하여 강해 지고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역을 심하게 하며, 종처럼 불이익을 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아들을 나으면 죽이는 법도 시행을 하였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요셉에게 주셨던 새 민족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모세가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모세의 우여곡절한 삶을 통해 출애굽을 이루어 가셨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나 유배 생활을 하던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 불이 붙어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그를 강권하셔서 능력을 덧입히며, 열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보여주며, 애굽의 신들보다 강하신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대열을 지어 홍해의 광야 길을 갈 때에 모세가 요셉을 유골을 챙겨 옮기고 있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13장19절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이는 요셉이 형들에게 하나님 앞에 맹세를 시키고 그것이 수세기를 지나서도 약속이 후손에게 전달되고 또한 이루어 지고 있음을 성경이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출애굽에 대한 요셉의 꿈과 하나님의 뜻이  함께 담겨 있는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출 애굽은 우리에게 새로운 민족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로 세워 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조명한다. 


추격하는 바로와 애굽의 군사에 쫓기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봉착하게 된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이 믹돌과 바알스본 이라는 지역 사이에 낀 바닷가 앞이었다. 바알스본은 애굽 북쪽 지역에 있는 바알신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애굽 사람들의 눈에는 애굽 신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봉착하게 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었다. 그 때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에 봉착함으로 애굽 군대에게 하나님이 여호와 되심을 보여 주시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극적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출렁이는 홍해를 바라보던 두려움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 물이 갈라지게 하시며, 그 물이 애굽 군대를 삼키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무사히 출 애굽을 하는 마지막 장면을 연출 하고 계시다. 죽음의 위기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사랑의 약속은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이유와 같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라고 부른다. 그것은 야곱의 삶에서 보여준 여러 의롭지 못한 행동들 처럼 이스라엘이 충성되지 못하고 순종 하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후손이 출애굽 하는 극적인 장면들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들의 탁월하거나 위대하거나 또는 의로워서 이기 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명기7장7-8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 하심으로 출 애굽 시키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눈동자 처럼 사랑하시고, 권능의 손으로 오늘도 신실한 약속을 지키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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